
아름다운 인격과 성품을 가지신 어른이 돈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회에 환원하라며 대가 없이 나누어 주고 선한 영향력이 꽃이 되고 있다하여 기사를 퍼왔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억지스런 말과 행동이 뉴스를 도배(뉴스를 보기가 괴롭다)하고 재난과 사고 앞에서 권력은 책임지려하지 않고(왜 그들은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가) 국민은 각자도생 중인 대한민국의 피로한 일상에 이처럼 멋진 어른이 계셨다는 사실에 마음 따뜻해지며 실낫같은 희망을 보게 되었다.
*출처: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2022.12.23.
김장하 선생이 살아온 길
한약방 가운데 전국 세금 납부 1위, 자동차 없이 자전거 타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열아홉에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1963년 고향에서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 진주로 이전했다. 남성당한약방은 50년간 운영되다가 지난 5월 말에 문을 닫았다. 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이크로 순서를 호명할 정도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빵을 나눠주기도 했다.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했는데 이는 그만큼 성실납세를 했던 탓이기도 하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았다.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대신 지역사회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명신고등학교를 개교했고, 10여년 간 이사장을 하다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했다. 또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돈이 똥과 같다는 생각
1991년 명신고 이사장 퇴임사를 통해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번 돈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기 때문에 내 자신을 위해 써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평소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눠야 사회에 꽃이 핀다"는 생각으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했던 김 선생은 해산(2021년)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서경방송 주식 포함)을 경상국립대에 기탁했다.
시민들이 사랑한 김장하선생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는 호 남성(南星)에 대해 김장하 선생은 '남성은 목숨 수(壽)를 맡은 별이라고, 남성이 비치는 곳에는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약방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들 오래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했단다.
김 선생은 늘 겸손했다.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1990년대 첫 민선 진주시장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회원들을 대상으로 추대할 시민후보를 뽑았는데 김 선생이 압도적으로 1위가 됐다.
김 선생은 아들·딸 결혼식을 올리면서 청첩장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수많은 사람이 하객으로 참석했는데, 축의금을 받는 창구가 없었다.
김 선생은 명신고 설립 뒤 이사장실을 없애고 이를 양호실로 쓰도록 했고, 결재는 서무실에서 했다. 학교에 갈 때는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이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주완기자가 취재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 줬으면 그만이지
"이만큼 베푼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 "20대 중반부터 50년 넘게 이어온, 기대 없이 베풀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 김장하(78, 호 남성 南星)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과 다양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취재해 쓴 책 <줬으면 그만이지>(도서출판 피플파워 간)가 나왔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감독 김현지)를 만든 MBC경남과 함께 김장하 선생에 대해 취재한 내용으로 책을 펴냈다. 김 선생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김주완 기자가 그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책을 썼다.
김장하 선생이 만난 사람들
대학 다닐 때 김 선생의 장학금을 받았던 문형배 헌법재판관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 김성진 전 보좌역은 "대선 후보 때 한약방을 방문했고, 50분간 만나고 나온 뒤 노 대통령께서 '참 좋은 분을 만났네. 정치인을 만나 훈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라고 하셨다. 뒤에 김 선생께 여쭈었더니 '정치 10단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라고 짧게 답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하고 나서 부산에서 축하모임이 있어 초대했지만 김 선생은 한약방을 지켜야 한다며 가지 않았다. 당시 <내일신문>은 '이런 사람이 총리가 돼야 한다'며 김 선생의 삶을 사진과 함께 1면 머릿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다. 김 선생은 노 대통령 서거 뒤 묘역 조성 때 박석에 이름을 새겨 놓기도 했다.
김장하 선생의 나눔의 삶
김주완 기자는 "요새 만원어치 봉사를 하면서 고아원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백만원어치 피알을 한다든지, 그 봉사의 가치를 되받으려 한다든지, 반대급부를 바라고 봉사를 한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실제 김장하 선생의 삶과 나눔은 이런 걸 철저히 배격하며 이뤄져 왔다.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는 보시, 이런 걸 실천해온 사람이 김장하였다"고 평가했다. 김 기자는 "선생은 나눔과 배품을 일상 속에서 실천했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선생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돈다고 한다"며 "선생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선생에게 그이를 본받고 배우려는 이들이 100명, 1000명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며 "선생은 장학생들에게 나에게서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대신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고 했다.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선순환, 이른바 '김장하 바이러스'다"고 했다